Page 9 - 2020년 11월 라이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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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파란색과 하얀색 사리를 입은 마더 테레사 수녀가 지프를 타

            고 학교 운동장을 도는 모습이 보였다. 하루는 그녀가 타파를 불러
            이름을 묻고, 학교를 좋아하는지 장래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의사가 되고 싶다거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하지 않고 지
            역사회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역사회 출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타파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
            는 베이 지역의 인도·네팔 레스토랑 다섯 곳 중 한 곳에 앉아 가슴에

            손을 얹고 마더 테레사의 친절함이 그에게 머물러 있다고 말한다.
            “그분은 제 가슴 속에 있습니다”                                유아교실의 어린이가 네팔 알파벳을 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왼손에 사파이어 반지, 오른손에 고양이 눈 모양 반지를 낀 작은 체
            구의 점성술사는 타파에게 그 반지들이 성공을 가져다줄 것이라 말               만든 특성화클럽인 버클리 안나푸르나 클럽의 회원이자 4-C3 지구

            했다. 이는 타파가 미래에 라이온이 될 것이라는 의미였을 수도 있다.            의 지대위원장이다.
            2003년 그가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미국에는 네팔인 라이온스클럽              슈레스타는 “우리 조상들은 받은것은 돌려주며 살았습니다”라고 설
            이 하나 있었다. 현재 네팔인 라이온스클럽은 그의 지구에만 7개가              명한다. 네팔 이민자에게 그들의 아버지, 삼촌 또는 다른 친척들이 뭘

            있고, 뉴욕주·코네티컷주·텍사스주를 포함한 미국 전역에 19개가               했느냐고 물으면 길을 닦고, 우물을 파고, 학교를 세웠다고 슈레스타
            넘게 있다. 타파는 네팔 이민 사회에서 배출된 최초의 지구총재였고,             는 이야기한다.
            현재는 특성화클럽 프로그램 코디네이터이다. 최중열 국제회장은 미               타파의 경우에는 학교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자신이 살던 곳으

            국에서 라이온스 회원이 감소하고 있는 이 시기에 네팔인클럽과 같               로 돌아가 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다음 자신의 남녀공
            은 특성화클럽이 라이온스에 성장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믿는다.               학 중등학교를 세웠다. 그는 각 가정의 딸들을 그의 학교로 보내도록
                                                              권했는데, 이는 당시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점점 욕심이 생기기
            다양성을 통한 봉사                                        시작했습니다”라며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향을 미치기 위해

            최중열 국제회장은 2018년 국제라이온스협회에서 진행한 인터뷰에               서 그랬죠.”
            서 “우리는 다양성이 함께하는 봉사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
            근 새로운 나라에 도착한 많은 이민자가 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              맨몸으로 미국에서 네팔인 라이온스클럽 창립

            는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지역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자신             불행히도 네팔 내전과 마오주의자의 반란으로 그의 계획은 중단되었
            들의 클럽을 만들고,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             다. 분쟁은 1996년부터 2006년까지 지속되었고 약 1만 3,000명이 사
            들에게 협회에 가입해 봉사할 기회를 줄 수 있습니다”                     망하고, 약 20만 명이 살던 곳을 떠나야 했다. 타파는 고문, 테러, 납

            이것이 타파가 네팔 이민 사회에서 행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자             치의 시대를 기억한다. 2003년 미국으로 이주했을 때 그에겐 ‘셔츠
            연스럽게 이루어졌다. 프라사드 코이랄라 네팔 전 수상은 1971년에             두 장, 바지 두 장, 아내와 자녀 두 명’만이 전부였다. 다음 날 아침 무
            라이온스클럽을 네팔에 창립했다. 반세기가 채 지나지 않아 네팔에               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2년도 채 안 되어 첫 번째

            는 800개 이상의 클럽이 생겼다. 타파는 그 클럽 중 하나에 속해 있           레스토랑을 샀고, 다음 해에는 특성화클럽인 버클리 안나푸르나 라
            었고, 이는 마닐 슈레스타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는 네팔에서 클럽 회              이온스클럽을 창립했다. 지역사회에 봉사하면서 그는 네팔인 라이온
            장을 지냈다. 그의 형제, 아버지, 장모도 모두 네팔에 있는 라이온스            스클럽이 네팔인들을 동화시켜주는 수단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클럽의 전 회장들이었다. 현재 슈레스타는 타파가 미국에서 최초로               타파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미국 친구들에게 “하이”라고, “우


                                                                                                    november 202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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